EP 1.  Noumenon
pexels-andreas-14756703.jpg
당신 앞에는 「 나무 」 가 있다
이것은 실제 상황이다

 그렇다면 당신의 입장에서 그 나무라고 하는 물체는, 정말로 존재하는 것인가?
번 잘 생각해보라. 지금까지 우리들은 그곳에 나무가 존재 '했'기 때문에, 우리도 그 나무의 존재를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틀렸다. 나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나무가 존재한다 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생각만이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나무라고 하는 것은, 나의 생각이 창조해낸 어떠한 결과물일 뿐이지, 실제로 나무 라고 하는 물체가 그곳에 존재하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렇다면 그 자리에는 과연 뭐가 존재했던 걸까? 그것은 알 수 없다. 하지만 거기에 과연 무엇이 존재하는가를 탐구하는 학문이, 바로 철학이다.

 나는 이것을 고대의 '잃어버린 지식' (로스트 테크놀로지)라 생각한다. 철학은 현대에 이르러, 과학이라는 거대한 집단에게 밀려나, 시대의 저편으로 사라져버린 로스트 테크놀로지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로스트 테크놀로지에는 실로 초월적인 지식이 내재되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따라서 그 잃어버린 지식들을 다시 되찾을 필요성이 요청되고 있는 것이다.
밀하게 이야기하여, 나는 그 잃어버린 지식들이 상당히 유해하다고 생각한다. 위의 나무의 예시처럼 말이다. 나무가 있으면 그냥 나무가 있다고 하면 되는데, 그게 나무라는 사실을 믿지를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굉장히 유해하며, 혼돈을 야기하기 적합하다. 나 또한 이러한 지식은 조현병과 다름없다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때문에 그 잃어버린 지식들은 단순히 과학과의 경쟁에서 밀려난 것이 아니라, 누군가 의도적으로 사장시켜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든다.
물론 이러한 추측은 언뜻 음모론에 불과하지만, 그런 음모론에 걸맞은 유해성이 실제로 잃어버린 지식 속에 담겨있다는 사실을 외면해서는 아니 된다. 따라서 나는 지금부터, 그 '금지된 지식' 을 다시금 세상에 소환할 것이다.

 크툴루 신화에는 「네크로노미콘」 이라는 마도서가 등장한다. 그 마도서를 읽어버린 자들은 초월적인 지식을 손에 넣게 되지만, 그 대가로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게 되며, 인간성을 상실하고 끝내 미쳐버린다고 전해진다. 나는 고대의 잃어버린 지식이 그 정도의 파괴성을 갖추었다고 확신하며, 수 년에 걸친 연구 끝에 그 잃어버린 지식들을 종합하여, 마치 「네크로노미콘」 같은 마도서를 집필하기로 하였다.
것은 금지된 지식이자, 금지된 마도서로서, 그 위험성으로 인하여 한번 이 내용을 이해하게 되면, 더는 과거의 일상으로는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잃어버린 지식을 세상에 공표하는 이유는, 단지 지식에 대한 나의 광기어린 집착 때문이라고 이해받으려 한다.
금지된 지식을 탐할 자격이 있는 자만이…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EP 2.  Postulate
photo-1531762901554-db903966e2d0.jpg
나무가 존재한다.

 위의 명제가 참의 진리값 (True) 을 부여받기 위해서는 하나의 조건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내가 진실만을 인식한다면 이라는 조건이다. 즉 만약에 내가 진실만을 인식한다면 위의 명제는 참의 진리값이 부여된다. 반대로 내가 거짓만을 인식한다면 위의 명제는 거짓의 진리값이 부여될 것이다. 이렇게 어떠한 명제가 성립되기 위하여, 암묵적으로 전제되는 조건을 '공리 (Postulate)' 라고 한다.
, 위의 경우에서는 '나무가 존재한다' 라는 명제 P가 True 의 진리값을 부여받기 위해서는, 내가 '진실을 인식한다면' 이라는 공리 S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공리 S를 정당화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생각해보라, 내가 언제나 진실을 인식한다는 보장이 어디에 존재한다는 말인가. 고로 공리의 보장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나무가 존재한다 라는 명제 P의 진리값은 결정될 수 없다.

 이처럼, 공리를 정당화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불완전성 정리' (Incompleteness theorems) 라고 한다. 불완전성 정리는 지금까지 언급한 내용을 형식화하여, 수학적 혹은 논리학적으로 증명한 것으로서, 쉽게 말해 '시스템이 완전하다는 것을 시스템 내에서는 증명할 수 없다' 는 이론이다. 즉, 설령 명제 P가 존재론적으로 참이라고 하더라도, 나의 인식 시스템이 완전하다는 것을 나의 인식 시스템 내에서는 증명할 수 없으므로, 공리 S의 정당화가 불가능하기에, 인식론적으로는 '결정 불가능성' (Undecidability) 을 가진다는 것이다.
라서 우리는 이러한 불완전성 정리에 의거하여, 앞서 문제시되었던 단지 '나무가 존재한다' 라는 아주 간단한 명제 P의 진리값조차 결정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하였으며… 결론적으로 우리는 지식을 획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명제 P를 정당화할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현재 시스템 내에서는 증명이 불가능하더라도, 그보다 상위 차원의 시스템에서는 증명이 가능해진다. 이를테면 또 다른 임의의 인식자를 데려와, 나무가 존재하는지의 여부를 검토하는 방안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진리값의 결정권을 임의의 인식자에게 양도한 것에 불과하므로, 임의의 인식자 자체가 진실을 인식하리라는 보장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데카르트는 그 자체로 완전무결한 초월적이며 절대적인 상위 차원의 시스템을 설정함으로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데카르트가 설정한 그 완전무결한 상위 차원이란… 바로 '신 (God)' 의 존재이다.
은 명제 P의 존재론적 진리값을 알며, 그러한 신께서 우리의 인식론적 공리 S를 보증해주신다. 고로 우리에겐 지식이 성립한다. 데카르트는 신의 존재를 요청함으로서, 지식의 정당성을 확보하는데에 성공한 것이다. 솔직히 나는 신을 요청해야만 했었던 데카르트에게 감탄하며 오열하였다. 설령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에게는 낭만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데카르트의 그 낭만은, 지식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터무니없는 망상에 불과하다. 나는 그것을 믿음에 의존하는 광기라고 규정해버리며, 데카르트적 '신의 요청 (Postulate of God)' 을 거부한다.
EP 3.  Demon
photo-1653584889483-00ed2206d849.jpg
 신은 우리에게 존재론적 원인 (Metaphysical substance)을 제공하고, 인식론적 지식 (Epistemological knowledge)을 제시하며, 윤리학적 당위 (Axiological sollen)를 확보하게 해준다. 그렇기에 신의 존재는 요청되었다. 하지만 묻겠다… 그것은 과연 정당한 요청인가.

 나는 불완전성 정리(Incompleteness theorems)를 통해 인식 시스템 S의 정당화가 불가능함을 논증하였고, 결정 불가능성(Undecidability)을 통해 명제 P의 진리값이 인식론적으로 결정 불가능함을 논증함으로서, 인간은 '지식을 획득하는 것이 불가능함' 을 논리적으로 보였다. 이 논제는 결과적으로 우리가 신을 소환하지 않는 이상, '지식을 획득하는 것이 불가능함' 을 의미하는, 데카르트의 악마 (Evil demon) 와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데카르트 이후의 철학사는 이러한 논의를 완전히 배제시킨 채, 지식이 존재한다고 가정하며, 인식론을 전개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부터는 데카르트가 그러했던 것처럼, 방법적 회의를 통해 도출되는 의심 불가능한 제1공리 (Axiom) 를 설정함으로서, 확실한 지식으로부터 세계의 모든 것을 연역하고자 한다… 소
크라테스의 대명제 「 무지의 자각 (I know that I know nothing) 」
그것은 지식을 획득할 수 없음을 깨닫는 존재, 이제 우리는 신의 존재 요청을 거부하고 무지의 자각으로 돌아갈 때이다. 무지의 자각으로 돌아갈 때, 역설적으로 진정한 잃어버린 지식이 열리리라. 그 유일한 공리로부터, 다시 세계의 모든 것은 연역되어지리라.

 「 무지의 자각 」 은 상기하였듯 유일한 공리이기 때문에, 오로지 이것만으로 세계의 모든 것을 연역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여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칸트가 제시하는 철학의 근본적인 세 가지 물음, (1)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2)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3) 나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 에 대해서만 연역하기로 한다.
이 과정에서 인식의 주체는 '무지를 자각' 하고 있으므로, 그 인식의 주체를 '나' 라고 정의한다면, 데카르트의 대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Cogito ergo sum)' 가 연역된다. 그러나 인식의 주체는 무지한 스스로의 존재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기에, 스스로가 아닌 다른 존재를 인식하였다 하더라도, 정말로 그것이 존재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고로 나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렇다면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인식의 주체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당위의 문제에 대해 논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설령 당위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인식의 주체에게는 당위가 무엇인지 알 수 없기에, 그 어떠한 당위 명령에도 지배당하지 못하는 상태라고 가정되어야 한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윤리학은 그 존재를 부정당하게 되며, 나는 아무것도 해야 할 것이 없다.
적으로 당위가 성립이 불가능하다면, 나는 자유를 희망할 수 있음이 연역되는 것이다.

자유를 희망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의 '당위 (Sollen)' 다
이제 누가 조현병이지, 정말로 그곳에 나무가 존재했었는가?
EP 4.  Unknown
photo-1563020295-e987be175dbd.jpg
이것에 대한 수학적 증명은 다음과 같다

■ Ax. ¬∃x(Kx)
  모든 존재는 무지하다  = 소크라테스 대명제 「 무지의 자각 」
■ Lem. ∃x(¬Kx)
  무지한 어떤 x가 존재한다  = 데카르트 대명제 「 나는 존재한다 」
■ Lem. ∀x(¬Kx → ¬∃y)
  x가 무지하다면  y는 존재하지 않는다  = (Q1) 인식론적 y 부정
■ Lem. ∀x(¬Kx → ¬∃ydominate(y, x))
  x가 무지하다면  y에게 지배당하지 않는다  = (Q2) 당위론적 y 부정
■ Df. Freex ≡ ¬∃y(dominate(y, x))
  x가 자유라는 것은  x를 지배하는 y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 자유의 정의
■ Th. ∀x(¬Kx ⊨ Freex)
  무지한 x는  필연적으로 자유이다  = (Q3) 실존적 자유 필연 논증


어둠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어둠은 빛의 부재로부터 얻어진 것이다
같은 논리로, 자유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자유는 다른 존재자의 '부재 (Unknown)' 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