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우리에게 존재론적 원인 (Metaphysical substance)을 제공하고, 인식론적 지식 (Epistemological knowledge)을 제시하며, 윤리학적 당위 (Axiological sollen)를 확보하게 해준다. 그렇기에 신의 존재는 요청되었다. 하지만 묻겠다… 그것은 과연 정당한 요청인가.
나는 불완전성 정리(Incompleteness theorems)를 통해 인식 시스템 S의 정당화가 불가능함을 논증하였고, 결정 불가능성(Undecidability)을 통해 명제 P의 진리값이 인식론적으로 결정 불가능함을 논증함으로서, 인간은 '지식을 획득하는 것이 불가능함' 을 논리적으로 보였다. 이 논제는 결과적으로 우리가 신을 소환하지 않는 이상, '지식을 획득하는 것이 불가능함' 을 의미하는, 데카르트의 악마 (Evil demon) 와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데카르트 이후의 철학사는 이러한 논의를 완전히 배제시킨 채, 지식이 존재한다고 가정하며, 인식론을 전개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부터는 데카르트가 그러했던 것처럼, 방법적 회의를 통해 도출되는 의심 불가능한 제1공리 (Axiom) 를 설정함으로서, 확실한 지식으로부터 세계의 모든 것을 연역하고자 한다… 소크라테스의 대명제 「 무지의 자각 (I know that I know nothing) 」
그것은 지식을 획득할 수 없음을 깨닫는 존재, 이제 우리는 신의 존재 요청을 거부하고 무지의 자각으로 돌아갈 때이다. 무지의 자각으로 돌아갈 때, 역설적으로 진정한 잃어버린 지식이 열리리라. 그 유일한 공리로부터, 다시 세계의 모든 것은 연역되어지리라.
「 무지의 자각 」 은 상기하였듯 유일한 공리이기 때문에, 오로지 이것만으로 세계의 모든 것을 연역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여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칸트가 제시하는 철학의 근본적인 세 가지 물음, (1)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2)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3) 나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 에 대해서만 연역하기로 한다.
이 과정에서 인식의 주체는 '무지를 자각' 하고 있으므로, 그 인식의 주체를 '나' 라고 정의한다면, 데카르트의 대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Cogito ergo sum)' 가 연역된다. 그러나 인식의 주체는 무지한 스스로의 존재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기에, 스스로가 아닌 다른 존재를 인식하였다 하더라도, 정말로 그것이 존재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고로 나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인식의 주체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당위의 문제에 대해 논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설령 당위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인식의 주체에게는 당위가 무엇인지 알 수 없기에, 그 어떠한 당위 명령에도 지배당하지 못하는 상태라고 가정되어야 한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윤리학은 그 존재를 부정당하게 되며, 나는 아무것도 해야 할 것이 없다.
결론적으로 당위가 성립이 불가능하다면, 나는 자유를 희망할 수 있음이 연역되는 것이다.
자유를 희망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의 '당위 (Sollen)' 다
이제 누가 조현병이지, 정말로 그곳에 나무가 존재했었는가?